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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es from more of You

우리의 고백, 우리의 씨름 - 모로뷰 more of You
모로뷰 이야기

우리의 고백, 우리의 씨름 - 모로뷰 more of You

우리의 고백, 우리의 씨름 - 모로뷰 more of You 글 : 장재호 선교사 (모로뷰 대표) "more of You - 주님, 더 주님으로, 더 당신으로." 모로뷰는 하나의 단체명보다도 우리의 고백과 기도문이다. 어제 만난 주님에 머물지 않고, 오늘 더 주님을 만나, 매일 더 주님을 경험하자. 우리는 이 말로 서로를 격려하며, 부르심에 응답하려 씨름하고, 도전하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는 여정을 이어왔다. 그래서 모로뷰를 소개하는 것을, 우리 공동체를 설명하기보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선교지로 보내주세요." 나는 종종 방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다. 선교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고, 언제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린 시절부터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꿈꿨던 나를, 하나님은 14살부터 국내와 국외 여러 선교 단체를 통해 여러 나라를 다니게 하셨다. 그러다 주신 마음에 따라 한국에서 청년들과 모임을 시작했고, 이웃과 선교지를 향한 걸음을 이어가던 스물여덟의 겨울,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 도대체 언제 땅 끝에 가볼 수 있는 거야?" 서른 전에 꼭 땅끝에 가겠다는 꿈. 단체 안에 있을 때는 기회가 많았지만, 더 이상 소속이 없으니 기회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항상 품고 있던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성령이 임한 사람은 당연히 모든 곳에서 증인이 되는 거구나. 이건 이미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기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들면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중단하고 50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기니비사우. 남쪽 끝 마을까지는 12시간을 더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 100% 무슬림 마을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단 한 사람, 모하메드를 만났다. "무엇이 가장 힘들어?" 나의 질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가족들이 나와 연을 끊고, 마을 사람들의 조롱과 박해가 너무 힘들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내가 읽는 이 성경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거야. 너무 외로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모하메드, 내가 너의 친구가 될게. 내가 네 가족이야. 그리고 내가 네게 더 많은 가족을 데려올게." (사진 1(기니비사우), 2(모하메드)) 함께 꾸고 싶은 꿈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땅끝에 도착했다고 느꼈던 그 순간, 주님은 내게 '함께 꾸고 싶은 꿈'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네가 불러와라…"(마 9:37-38) 그날 이후 나는 한국에 돌아와 기니비사우라는 나라를 알리고, 함께 가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복음 전할 이가 없는 땅끝을 향해 '일꾼'을 동원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모로뷰에서 제자훈련 책을 펴고 모임을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 훈련을 경험하지 못했던 청년들, 교회 리더로 나누기만 하다 지쳐 있던 사람들, 공동체를 갈망하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다.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카페에서도 모일 수 없었다. 그러나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사용하던 모로뷰에서는 모일 수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찾았다. 그리고 이럴수록 '모이기에 힘써야 함'을 알았던 우리는 온라인 플랫폼을 찾았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곳곳에서 공동체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함께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고, 나누고 싶지만 함께할 공동체나 모임이 없는 사람들이 갈증을 가지고 우리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모임을 진행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매일같이 말씀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과 선교의 사명을 외쳤다. 복음 전도 키트를 만들어 길거리로 나갔고, 다른 지역에 계신 분들은 배송을 받아 서로 인증하며 기도로 함께 했다. 그리고 함께 선교를 꿈꾸며 계획했다. 서로의 지역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고, 공항에서 처음 만나기도 했다. 지난 9년 동안 우리는 어떤 소속도, 후원도 없이, 학업을 미루고 직장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사비로, 짧게는 일주일부터 길게는 두세 달까지 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늘 기억했다. "선교지에 왔다고 선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선교사로 살았는가." 매 여름마다 팀이 기니비사우로 들어갔다. 무슬림 아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교육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00% 무슬림이라 불리던 마을에 변화가 일어났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두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인정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2022년, 기니비사우에 성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준비하심 가운데 저작권을 받아 현지어 성경을 만들었을 때, 옮길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자발적으로 일터를 멈추고, 자비로 짐을 비워 성경으로만 가득 채울 사람들이 필요했다. 작은 교회부터 소모임까지 지방 곳곳을 찾아다니며 알렸다. 그렇게 40명이 모여 그 땅으로 향했다. 마을 곳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무슬림으로 가득한 그 땅에서 함께 예배하며 찬양했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 자리조차 예배가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모두가 모하메드를 둘러싸고 기도했다. 그리고 다가가 말했다. "말했지?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이 모든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한 가족이야, 네 가족이야." 눈물을 흘리며 너무 행복하다고,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고백하는 모하메드의 모습은,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이어졌다. 실제로 그의 친구와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모하메드에게 진정한 가족이 늘어갔다. (사진 3(결혼식), 사진 4(40명의한국인)) 사역이 아니라, 한 영혼과 더 많은 시간을 모로뷰에서는 '사역'이라는 단어를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 그 단어로 상처받은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다가갔을 때, 아이들은 "무언가를 주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복음을 돈이나 혜택과 연결해 오해하며 상처 입고, 변질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여러 단체 속에서 다양한 사역에 함께 했지만, 가장 아쉬웠던 건 아이들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의 눈빛, 순수한 웃음을 마주할 때면 "이게 내가 꿈꾸던 거구나" 싶었지만, '사역'이라는 이름으로는 관계의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단기선교팀을 데리고 피딩이나 의료사역 등을 인도하며 아이들과 부딪히는 시간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삶 안으로 더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단체, 사역 등의 타이틀을 내려놓고 무작정 찾아갔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두 달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먹고, 뛰고, 웃었다. 그리고 그 끝 무렵, 한 아이가 다가와 말했다. "형은 다른 외국인들과는 달라. 형은 진짜 내 친구야." 그 말이 방향을 분명히 해주었다.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한 영혼의 친구가 되어,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 그것은 짧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래, 반복적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이야기 "다시 올게." 그 약속이 얼마나 자주 지켜지지 않는지, 그들이 얼마나 이 말을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상처받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명히 말했다. "나는 진짜 돌아올 거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난 12년 동안, 매년 두 번, 많을 땐 세 번씩 아이들을 찾아갔다. 그저 함께 뛰어놀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선교하러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렇게 말한다. "내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누가 보아도 '사역'이라 부르기 어려운, 그러나 꾸준히 곁에 있어 주는 일이 이어졌다. 그 길 위에서 감동한 사람들이 하나둘 함께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는 두 아이의 손밖에 잡지 못했는데, 이제 우리는 친구를 넘어 가족이 되었다. 물론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 역시 할 수 있는 한 그 일에 함께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듣고, 관계 속에서 복음을 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입에서 직접 듣는다. 빈민촌 같은 곳에도 빈부격차와 깊은 상처가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의 집, 너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에서 예배하며, 가장 소외된 아이들 가운데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현지 사역자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다준 교재로 배우는 복음을 넘어 함께 살아내며 체득하는 '가족'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꿈은 분명하다. 오늘 선교사라 불리지 않아도, 선교사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빈민촌이 사라지고,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흩어진다 해도, 그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선교사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흩어지는 그 길이 오히려 파송의 길이 되고, 그 마을과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가족과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기대한다. (사진 5 (친구가 되고 가족이되는 이야기)) 미셔널 커뮤니티 "네가 본 것을 가지고, 이곳에서 공동체를 시작하라." 많은 이들이 유럽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말했지만, 내가 함께 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있었다. 서로의 집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전도하며, 하나님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떠올리게 했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연합보다 분열이 많고, 교회 밖의 모임은 오해와 비난을 불러오기 쉬웠다. 그러나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문화를 이긴다." "앞으로를 걱정하지 마라. 한 주의 순종이다." 그 한마디로 작은 카페에서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 교회 리더들, 공동체를 갈망하던 청년들,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모여 "오늘의 하나님"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권했다. "교회에 돌아가서도, 하실 수 있어요. 근황 토크로 끝나는 셀모임을 넘어, 오늘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매일의 간증을 만드세요." 그렇게 이어진 '한 주의 순종'은 500회를 넘겼고, 9년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이웃에서 가까운 나라, 그리고 땅끝 같은 아프리카까지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 되었다. 내가 10년 전 유럽에서 본 공동체를 미셔널 커뮤니티라 불렀다. "선교'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임무를 받은 그리스도의 몸임을 고백한다. 선교사Missionary는 본래 mission + ary, 곧 '임무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특정 직함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선교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내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미셔널 커뮤니티다. (사진 6 온라인 모임 / 사진 7 모로뷰 오프라인 모임) " 우리의 고백, 우리의 씨름, more of You " 그래서 앞서 말했듯 모로뷰는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씨름이며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있으며 WEC, YWAM 같은 선교단체와 협력하여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돕는 일, 그리고 '땅에 쓰신 글씨 프로젝트'와 'EBPN(End Bible Poverty Now)'와 동역하며 성경과 전도지, 오디오바이블을 배포하러 일본, 인도, 아프리카를 다니고 있다. 우리는 어디든 초대받아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까운 이웃이든, 땅끝이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언제든 발걸음을 내딛었다. 항상 자발적이지는 못했으나, 더 자발적으로 순종하기 위해 서로를 부추기고 씨름하고 있다. (사진 6(전도지배포), 7(오디오바이블배포)) Q. 하나님을 나누고 싶지만 교회나 셀모임에서 쉽지 않나요? - 함께 주님으로 더해지는 모임을 가져보고 함께 기존 공동체에서 도전해봅시다 Q. 선교에 마음은 있지만, 언어나 소속이 부담스러우신가요? - 언제든 우리를 초대해 주세요. 이미 번역된 전도지를 함께 나눌 수도 있고,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작은 일에도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더 큰 하나님의 꿈을 함께 꿔봐요! 혹시 마음이 움직이신다면, 우리와 함께해 주세요. 여러분의 걸음이 또 하나의 간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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